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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캐스트] 눈물의 의미 아는 이들의 훈훈한 인정
  • 작성일2014/03/10 00:00
  • 조회 876


 

지난해 구세군의 빨간 자선냄비에 걷힌 성금은 약 52억 원이었다. 서울 명동에선 한 초로의 신사가 1억570만 원 수표를 넣었다.

‘신월동 주민’이라고 자신을 밝힌 그는 동봉한 편지에 “호강 한번 못해보고 쓸쓸히 생을 마감한 부모님 유지를 받들어 작은 씨앗 하나를 구세군의 거룩한 숲속에 띄워 보낸다.”고 썼다.

구세군은 2011년 세모에도 명동 큰 길에서 1억1천만 원 수표를 쾌척한 신사가 이번에 또 수표를 넣은 것으로 추정했다.

훈훈한 사연은 이밖에도 많았다.

‘중곡동 한 할미’는 “3년 동안 매일 파지를 모아서 판돈에다, 친구도 도왔다”면서 301만2천원을 넣었다.

경기도 안양에서는 벌써 9년째 1천만 원 권 수표가 들어왔다는 것이며 돌아가신 친정 부모님 수첩에서 꼬깃꼬깃 모아둔 돈을 발견하고 “불우이웃돕기에 써 달라”며 맡긴 사람도 있었다.

또 자선냄비 사상 처음으로 한 익명 인사가 1억 원을 계좌이체 했고 100만원 수표가 십 수년째 나오는 곳도 적지 않다.

 

1928년, 한국에 자선냄비 첫 선보여


구세군 주최 자선과 설치

1928. 12. 22 [동아] 3면    

자선냄비는 1891년 미국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선을 보였다.

우리나라엔 이보다 37년 늦은 1928년 인천에 등장했다.

훗날 박준섭으로 개명한 조셉 바 사령관이 가마솥을 걸어놓고 성금을 걷어 수재민을 도왔다.

그리고 이제 85년, 해마다 송년 거리풍경으로 자리 잡은 빨간 자선냄비는 숱한 화제를 만들어왔다.

스님이 시줏돈을 몽땅 털어 넣고 갔다거나 2, 3천만 원 수표를 천원 지폐로 싸 넣어 선행을 감추려한 얘기들이 사람들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나 사실 70년대까지만 해도 자선냄비 성금액수는 그다지 큰 게 아니었다.

74, 75, 76년엔 구세군이 목표한 모금액의 70~80% 수준에 그쳤다.

그렇다고 목표가 엄청 컸던 것도 아니다.

76년엔 1천만 원이었고 78년 경제가 좀 풀렸다고 해서 크게 올려 잡은 목표가 3천만 원이었다.

물론 액수의 과다가 훈훈한 인심의 척도가 되는 건 아닐 것이다.

당시엔 지금의 1천원 지폐나 100원 동전쯤 되는 10원, 1원짜리가 몇 만개씩 걷혔기 때문에 ‘스스로 가난을 무릅쓰고 남에게 봉사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고 할 수도 있다.

 

어려운 이웃을 직접 돕는 경우가 많았던 70년대


영하의 추위에 갈 곳 없는 4남매

1976. 12. 03 [동아] 7면    

과거엔 자선냄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불우이웃을 돕기보다 직접 어렵고 힘든 이웃을 찾아 구호의 손길을 내미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신문과 방송에 누군가 딱한 사연이 보도되기라도 하면 여기저기서 온정의 손길이 답지했다.

요즘과 달리 옛날신문은 인생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얘기를 자주 발굴해 다뤘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고 인생은 작은 축복으로도 새롭게 펼쳐질 수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기꺼이 그 불우이웃을 찾아가” 도움을 자청하곤 했다.

76년 연말엔 이런 일이 있었다.

서울 구로동 단칸셋방에 사는 12살 OO양과 8살, 5살, 3살 남동생 등 4남매의 딱한 사연이 신문에 실렸다.

4남매 어머니는 생활고에 못 이겨 가출했고 운전사인 아버지(33) 밑에서 자랐는데 그 아버지마저 교통사고를 내 구속되었다.

인정 많은 셋집 주인이 아이들을 돌봐줬는데 경제난에 집을 팔게 돼 4남매는 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다는 사연이었다.

사실 요즘 세상에야 이런 얘기 정도가 기사로 실릴지 의문이지만 당시엔 이 사연이 보도되자 훈훈한 인정이 정말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외톨이 4남매’ 보도되자 ‘인정의 손길’
1976. 12. 16 [동아] 7면    

기사가 나간 사흘 후 단칸셋방에 한 40대 신사가 찾아왔다.

울먹이는 아이들 얘기를 다소곳이 듣던 신사는 주머니에서 24만원을 꺼내 그중 8만원으로는 앞집 다른 전세방을 얻어주고 “나머지 돈으로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아껴 쓰며 살아라.”고 위로하고 돌아갔다.

이름과 주소만이라도 알려달라고 했으나 신사는 그저 4남매 머리만 쓰다듬었다고 한다.

여기에 안양여고생 3명도 집에 찾아와 달걀 80개를 놓고 갔다.

어느 회사원은 쌀 1가마니를 용달차에 싣고 와 전달하며 격려했다.

아버지와 같은 직업 운전기사들의 동병상련도 눈물겨웠다.

자가용 기사 김 씨(39)는 근무도중 틈틈이 동료들에게 “불쌍한 아이들을 도와주자”고 호소해 1백65명으로부터 2만7800원을 모았고 범양, 한양 등 중견기업 운전 직원들도 몇 만원씩 성금을 걷어 전달했다.

4남매 중 장남의 초등학교 급우들도 옷과 쌀을 모은 데다 학교선생님들의 성금 5만원까지 보태 찾아왔다.

기사가 나간 지 불과 열흘 만에 4남매에게 전달된 성금 성품은 82만3920원에 쌀 3가마, 밀가루 2부대, 라면 6상자, 옷가지 50여점에 이르렀다.

 

TV 드라마에 소개된 딱한 사정에 잇단 성원


TV 드라마 ‘형제들’ 딱한 사정 보고 성원 잇따라 
1975. 01. 04 [경향신문] 8면    

어린이들의 딱한 사연에만 도움이 쇄도한 것도 아니었다.

74년엔 경찰서 보호실에서 20년 만에 범죄자로 만난 20~30대 젊은 형제 3명의 이야기가 사람들을 울렸다.

경남 진주경찰서에 공갈협박 혐의로 잡혀온 전과 7범 맏형(31)이 심문을 받던 중 절도 혐의로 잡혀 보호실에 대기 중이던 25, 21세짜리 두 동생을 우연히 만난 것.

워낙 집이 가난해 어린 나이에 일찍 가출해 나쁜 길로 들어섰던 형이 먼저 동생들을 알아보고 눈시울을 붉혔고 3형제는 끝내 보호실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참회의 눈물을 쏟아냈다.

이들 3형제 얘기는 당시 최고인기를 끌던 TV드라마 ‘수사반장’에서 다뤄졌다.

형제 중 2명은 혐의가 확실해 구속 기소됐고 동생 1명은 석방됐으나 기술도 없고 일자리도 없어 먹고살 길이 막막한 형편이었다.

진주서 형사들이 동생의 일자리를 구해주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수사반장 팀’에 연락했는데 그것이 ‘형제들’이란 부제로 방영됐다.

극중 수사반장으로 나온 최불암 씨가 드라마 말미 “이건 실화입니다.

이렇게 참회하며 살길을 찾으려는 데도 먹고살 길이 막연한 형제들…

정말 우리 사회는 이들을 그대로 놔둬야만 하는 걸까요?”라고 호소한 뒤 각계에서 온정이 쏟아졌다.

형제들과는 일면식도 없는 미용실 주인이 성금을 보내오고 전자회사 공업사 등에서 3형제를 책임지고 맡아 일자리를 주겠다고 나섰다.

철공사, 제과점 주인 등이 기술을 가르쳐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도록 뒷받침하겠다고 하는 등 방송국에는 이들을 돕겠다는 전화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대부분 넉넉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를 참회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에게 베풀어지는 작은 온정이 축복처럼 그 인생을 뒤바꿔 놓을 것임을 확신하는 사람들”이었다.

 

전국 각지 안타까운 사연에 발벗고 도운 국민들


8세 소녀 가장 “행복을 주세요”
1979. 02. 13 [경향신문] 7면    

79년엔 맹인 아버지와 여군출신 반신불수 어머니, 뇌성마비로 불구가 된 오빠 등 5식구를 뒷바라지해온 8세 소녀가장 얘기가 세상에 전해졌다.

연탄공장 배달부, 중동 건설근로자, 전방의 국군장병이 성금을 보냈는가 하면 신문사에는 빨간 돼지저금통을 통째로 들고 온 코흘리개 초등학생도 적잖았다.

신문을 팔아 학교에 다니는 고학생 모임과 유산균 음료 배달원 아주머니들도 돕기 행렬에 동참했다.

눈물겨운 것은 모 공장 여공 6명이 쥐꼬리 월급으로 라면과 과자 등을 사가지고 소녀가장 집을 방문, 청소도 하고 라면도 끓여먹으면서 하루를 함께 보내준 것.

성금액수도 3백만 원에 달했다.

신문과 방송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사연을 감동적으로 보도하자 제보도 줄을 이었다.

83년에는 전남 고흥군 나로도의 중학교 여선생이 ‘피지도 못한 채 지려하는 꽃봉오리의 애절한 사연’을 신문사에 전하며 도움을 호소했다.

13살짜리 자기 반 여학생이 체육시간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는데 심장판막증으로 밝혀져 “하루하루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는 것.

여선생은 “언제나 눈빛이 초롱초롱하던 이 학생은 도회지 어떤 학생 못지않게 총명하고 활달했다”며 “수술비를 감당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가족과 우리 섬 학생들에게 다시 웃음을 선사할 수는 없겠느냐”고 도움을 청했다.

이 사연은 별로 크지도 않은 사회면 가십기사로 보도됐다.

그러나 그 반향은 엄청났다.

한 독지가가 “방금 퇴직금으로 받은 돈”이라며 20만원을 들고 신문사로 찾아왔고 중동 건설근로자 여행사 직원, 대기업회장 등이 성금을 보냈다.

보건사회부장관은 국립의료원에 무료수술을 당부했고 코미디언 이주일 씨도 출연료를 수술비로 내놓는 등 이름 없는 시민들이 합세해 모아준 돈이 4백만 원에 이르렀다.

기사가 보도된 지 한 달 만에 여학생은 수술을 받았고 완치돼 “사그라지는 생명의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해준 고마운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편지가 신문에 보도돼 사람들의 언 가슴을 녹였다.

 

이 겨울, 주위의 딱한 이들을 돌아봄이 어떨지..

70, 80년대 부끄럽고 딱하며, 춥고 시리기만 한 인생의 고난이 신문방송에 보도돼 무명시민들 도움을 받고 재생의 기쁨을 누린 이들의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대학에 합격했으나 등록금을 마련 못해 애태우던 학생, 가정부 일을 해 번 돈을 고향의 동생들에게 송금하다 사기를 당하고 울부짖던 소녀, 강도피해를 당한 착한 감잣국 장수와 그의 부인, 다리 밑에서 어렵게 겨울을 나는 빈민가족들 얘기가 보도될 때마다 착한 시민들, 남의 눈물을 제 가슴으로 울어줄 줄 아는 사람들이 그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추운 인생의 겨울을 이길 수 있는 축복을 내려주었다.

81년 무렵엔 한국을 처음 찾은 테레사 수녀가 한 얘기도 사람들 가슴에 찡한 여운을 남겼다.

“볼품없는 내 사진을 많이 찍는 대신 그 필름 값을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써주세요!”

숨어서 남을 돕는 기부 천사들이 우리 사회에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불우시설, 사회복지시설을 찾는 사람의 숫자는 해가 갈수록 줄고 있다는 기사가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겨울이다.

가난하고 비참한 이들 기사가 언론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 런지…

 

[출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47&contents_id=18225